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니 맥그레인 (문단 편집) === 클럽 경력 === ||<-2>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Danny McGrain1.jpg|width=100%]]}}} || 그는 [[글래스고]]에서 태어났고, 어린 시절 [[퀸즈 파크 FC|퀸즈 파크]] 유소년팀에서 축구를 시작했고, 스코틀랜드 청소년 국가대표팀에서 뛰기도 했다. 그리고 17세가 되던 1967년에 [[셀틱 FC|셀틱]]에 스카우트되어 [[셀틱 FC 아카데미|셀틱 리저브]]팀에 들어가게 된다. 맥그레인이 유스팀에 입단했을 때 그곳에는 훗날 셀틱의 전설들이 되는 [[케니 달글리시]], [[루 마카리]], [[데이비드 헤이]] 등도 속해 있었다. 맥그레인은 이전부터 라이트백으로 뛰어왔는데, 셀틱 유스팀에 들어오고 나서 미드필더에서 플레이를 해보는 등 다양한 포지션에서 경기를 뛰어보기 시작했다. 그는 성인 무대에 데뷔하기 전까지 마리힐 주니어 클럽에 다녀오는 등 경험을 쌓았다. 그리고 1970년 [[페예노르트 로테르담]]과의 [[유러피언 컵]] 결승전에 [[케니 달글리시]]와 함께 명단에 포함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. 다음 시즌인 1970년 8월 26일에 열린 [[던디 유나이티드 FC|던디 유나이티드]]와의 [[스코티시 리그컵]] 경기에서 교체 출전하며, 성인 무대 데뷔전을 치르게 되었다. 3일 뒤에는 [[셀틱 파크]]에서 열린 [[그리녹 모턴 FC|그리녹 모턴]]과의 리그 경기에도 출전하며 리그 데뷔전도 치르게 되었다. 데뷔 첫 두 시즌 가량은 [[조크 스타인]] 감독 밑에서 많은 출장기회를 받지는 못했다. 그러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오는 경기마다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다. 맥그레인은 1971-72 시즌에 리그 10경기에 출전하는데 그쳤다. 그 이유는 이전에 [[폴커크 FC|폴커크]]와의 경기에서 더그 솜너와 머리를 부딪히면서 두개골 골절을 입었기 때문이다. 1972년 3월 25일, 그는 복귀전을 가지게 되었다. 부상에서 완전히 외복한 그는 1972-73 시즌부터 확고한 주전 라이트백이 되었다. 이 시즌에 리그에서만 30경기를 소화했고, 스코틀랜드 23세 이하 팀에서도 활약하게 되었다. 1970년대의 맥그레인은 세계 최고의 라이트백 중 한 명으로 평가 받았다. 그는 요즘 현대 축구에서 쓰이는 용어로 정의하면 공격형 풀백이었으며, 공수먕면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였다. 그는 폭발적인 스피드를 가지고 있었고, 좋은 기술과 좋은 온 더 볼 능력, 넓은 시야와 예측력 그리고 다소 거칠어 보이지만 공만 깔끔하게 빼오는 태클에 능했다. 그는 1973-74 시즌에 리그와 [[스코티시컵]]을 들어올렸고, [[1974 FIFA 월드컵 서독|1974년 월드컵]]에도 참가했다. 맥그레인은 월드컵을 치른 직후 [[당뇨병]] 진단을 받았으나, 약물 치료를 받으며 경기를 계속 뛰었다. 1977년, 맥그레인은 리그와 스코티시 컵 우승을 거두며 두번째 더블을 기록했다. 또한 해당 시즌에 스코틀랜드 축구 기자 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기도 했다. 그리고 당시 주장이었던 [[케니 달글리시]]가 [[리버풀 FC|리버풀]]로 떠나면서 1977-78 시즌부터 그가 주장을 맡게 되었다. 그러나 이상한 발 쪽 부상으로 인해 거의 한 시즌을 통으로 날리게 되었다. 그 부상 때문에 [[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|1978년 월드컵]]도 출전하지 못했다. 맥그레인이 없는 상태로 시즌을 치른 셀틱은 단 한 개의 우승 트로피도 들지 못했고, 1960년대 초반 이후로 처음으로 유럽대항전 진출에도 실패하게 되었다. 1979년 봄, 이미 리그가 18경기나 치러졌을 때 알 수 없는 발 부상에서 맥그레인은 복귀했고, 감독도 [[빌리 맥닐]]도 바뀌어 있었다. 부상에서 돌아온 그는 이전과 다른 스타일의 플레이를 구사할 수 밖에 없었다. 속도는 눈에 띄게 감소했지만, 상대 플레이를 예측하는 능력과 볼 배급 능력이 향샹되어 이전보다 느려진 속도를 충분히 보완했다.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[[레인저스 FC|레인저스]]를 상대로 4:2 승리를 거두며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. 맥그레인은 1981년에 다리 부상을 한 차례 당해 일정 기간 경기를 뛰지 못한 것을 제외하면, 1980년대 초중반을 주축 선수로서 활약했고, 3번의 리그 우승, 2번의 스코티시 컵 우승, 1번의 스코티시 리그 컵 트로피를 들어올렸다. 1985년 10월, [[세인트 미렌 FC|세인트 미렌]]과의 경기에서 셀틱 소속으로 600번째 경기를 치렀다. 당시 감독이었던 [[데이비드 헤이]]는 그를 가리켜 "최고의 선수이며 진정한 프로다"라고 말했다. 당시 에어드리에서 맥그레인에게 선수 겸 감독직을 제안해 성사 단계 직전까지 갔지만, 맥그레인은 셀틱에 1년 더 남아 36세의 나이로 후반기에 2경기 결장한 것을 제외하고 모든 경기를 소화했다. 1987년 5월 9일, [[하트 오브 미들로시언 FC|하츠]]와의 리그 원정 경기를 가졌는데, 이 경기가 그의 셀틱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다. 1987년 5월, 맥그레인은 자유 계약 선수로 풀렸고, [[해밀턴 아카데미컬 FC|해밀턴]]과 계약을 맺게 되었다. 이곳에서도 주전으로 뛰며, 팀을 [[스코티시 프리미어십|스코티시 프리미어 디비전]]으로 승격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은퇴를 선언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